분자유전학실험실 (단국대학교 분자생물학과)



 이성욱 ( 2009-12-11 09:51:04 , Hit : 4585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 공포의 기억을 지운다


KISTI 『글로벌동향브리핑(GTB)』 2009-12-10

  
미국 뉴욕대학의 심리학자인 엘리자베스 펠프스(Elizabeth Phelps) 박사 연구팀은 Nature 최근호에 기고한 논문에서, 인간의 뇌가 기억을 저장하고 불러들이는 방법을 이용하여, 약물을 이용하지 않고도 공포의 기억을 1년 이상 지울 수 있는 방법을 개발했다고 발표하였다. 장기기억은 다시 인출(引出)될 때 일시적으로 취약상 상태(vulnerability)를 거친 다음 나중에 다시 회상되기 위하여 새로 저장되는데, 연구진에 의하면 기억이 이처럼 취약한 상태에 있는 틈을 타서 그것을 변형하거나 교란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기억은 젖은 콘크리트 표면에 쓴 글자와 비슷하다. 시간이 지나서 콘크리트가 굳어져야 장기적인 기억이 형성되고, 콘크리트가 굳기 전에 그 위에 다른 글자를 쓰거나 표면을 쓸어버리면 본래의 글자가 지워져 버린다. 이렇게 콘크리트가 굳어지는 과정, 즉 단기기억이 장기기억으로 굳어지는 과정을 응고화(consolidation)라고 부른다. 응고화 가설에서 한 발 더 나가서 재응고화(reconsolidation) 가설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오래된 기억이라도 일단 의식 속으로 기억을 인출하면 그 기억이 다시 응고화 과정을 거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잘못되면 기억이 지워지거나 바뀌거나 왜곡된다는 것이 재응고화 가설이다.

카림 네이더(Karim Nader)와 조지프 르두(Joseph LeDoux) 등은 2000년 Nature에 기고한 동물실험 결과에서 "약물을 이용하여 장기기억의 재응고화 과정을 방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표함으로써,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등을 유발하는 공포의 기억을 지울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던져 주었다(Nature 406, 722-726; 첨부그림 참조). 그러나 이 연구는 재응고화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몰라도, 기억을 지우는 데 사용되는 대부분의 약물이 인간에게 해로운 것이라는 문제점이 있었다. 한편 킨트(Kindt) 등은 올해 초 Nature Neuroscience에 기고한 논문에서 고혈압 치료제인 프로프라놀롤(propranolol)을 이용하여 특정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하였다고 발표하여 안전성의 문제를 불식시켰지만, 이 방법은 모든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었다(Nature Neuroscience 12, 256-258; GTB2009020796).

그러나 펠프스 박사는 이번 연구에서 행동적 기법(behavioural technique)을 이용하여 인간의 공포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하였으며, 이 효과가 1년 이상 지속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그간의 숙원을 해결한 것이다. "우리는 동물을 모델로 한 선행연구 결과들을 충분히 검토한 후에, 이러한 방법들을 보다 정교화하여 인간에게 적용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이제 남은 것은 후속연구를 통하여 임상에 적용하는 것뿐이다."라고 펠프스 박사는 말했다.

공포의 기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종종 소거요법(extinction therapy)이라는 심리치료를 받는다. 소거요법이란 환자를 공포의 기억을 초래한 사건(예: 뱀에 물림, 총에 맞음)에 반복적으로 노출시켜, 그것이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서서히 학습시키는 방법을 말한다. 그러나 소거요법이 일부 환자에게 효과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치료를 받은 후에도 기억 자체는 여전히 뇌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에, 나중에 얼마든지 되살아날 수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어 왔다. 펠프스 박사는 "소거요법의 타이밍을 이용하여 재응고기간(reconsolidation period)의 취약성을 공략한다."는 전략을 수립하였다. (재응고기간은 기억이 인출된 후 3분 후부터 수시간 후까지의 기간을 말하는데, 이 기간 동안 기억은 `말랑말랑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변형이나 교란이 가능하다.)

연구진은 먼저 실험 대상자들에게 다양한 색깔이 칠해진 사각형을 보여주면서, 특정 색깔의 사각형이 나타날 때 그들의 손목에 약한 전기충격을 주는 훈련을 시켰다. 훈련이 끝난 후 특정 색깔이 칠해진 사각형은 피험자들에게 공포의 기억을 심어 주었는데, 펠프스 박사는 땀샘의 활성변화를 이용하여 이러한 공포의 정도를 측정하였다.

공포형성 학습[이를 공포조건화(fear conditioning)라고 함]이 끝난 다음날, 연구진은 기존의 소거요법을 자체적으로 변형한 독특한 소거요법을 시작하였다. 연구진은 먼저 피험자들에게 특정 색깔의 사각형을 보여 주면서 공포의 기억을 되살린 다음, 10분 후(즉, 기억이 아직 취약한 상태에 있는 시점)에 전기충격을 가하지 않으면서 반복적으로 그 사각형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 다음날 피험자들의 특정 색깔의 사각형에 대한 공포감은 사라졌는데, 이는 재응고화 과정이 차단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공포감은 1년 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와 대조적으로 공포의 기억을 되살린 지 6시간 후에 소거요법을 실시한 피험자들은 1일 후나 1년 후에도 여전히 특정 색깔의 사각형에 대한 공포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이상의 실험결과를 종합하여, "소거요법의 실시 타이밍을 조절함으로써 약물을 사용하지 않고서도 공포의 기억을 장기적으로 지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번 연구결과가 임상에 당장 적용될 수 있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손목에 가하는 약한 전기적 충격이 이라크의 전장(戰場)에서 들리는 병사들의 비명과 동일할 수는 없다는 점을 지적한다. 이에 대하여 이번 연구의 공동저자인 조지프 르두 박사는 `실험실에서 유발된 공포`와 `외상후스트레스장애` 사이에 존재하는 크나큰 갭을 인정하면서도, 이번 연구가 지니는 임상적 시사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한편 프로프라놀올을 이용하여 기억을 지우는 데 성공했던 킨드 박사(현재 암스테르담 대학에 재직 중)는 연구진이 피부(땀샘)의 활성을 공포의 유일한 측정수단으로 사용했다는 점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고 비평한다. 왜냐하면 그것(땀샘)은 공포에만 특이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번 연구는 장기기억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형성되는지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해 주었으며, 행동과학적 요법을 통하여 공포의 기억을 안전하게 소거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나 임상적으로 의의가 크다고 생각된다.

Reference: 1. "Preventing the return of fear in humans using reconsolidation update mechanisms", Nature advance online publication 9 December 2009.
2. Nader, K. et al. Nature 406, 722-726 (2000).
3. Kindt, M. , Soeter, M. & Vervliet, B. Nature Neuroscience 12, 256-25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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